블로그 인터뷰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 주인공의 어머니, 김길자 님이 전하는 기억의 힘

김길자 님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이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처럼 문재학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라남도청 안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유족을 안내하는 일을 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살해되었다. 김길자 님은 그렇게 아들을 국가폭력에 잃은 이후로 지금까지 5.18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투신하였다.

김길자 님이 기억하는 문재학 열사는 어떤 모습일지, 5.18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에 김길자 님의 생을 바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지, 무엇보다 5.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2024년 10월 22일 김길자 님을 직접 만나 여쭤봤다.

김길자 님이 10월 22일 자택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이너들을 맞이하고 있다.

Q. 김길자 님 안녕하세요, 먼저 앰네스티 지지자분들께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80년 5월 27일 새벽에 사망한 문재학이 어머니 김길자입니다.

나는 꼭 재학이 엄마라고 소개해. 누군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나는 아줌마가 아니여, 재학이 엄마여, 꼭 그랬지. 재학이 이름 안 잊어 불라고 그러고 다녔어. (한국지부 캠페이너와 오랜 인연이 있으신 김길자 님은 편하게 반말로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Q. 얼마 전, 아드님이신 문재학 열사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있었잖아요. 수상 소식 이후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셨는지요?

<여섯 시 내 고향>을 보고 테레비를 안 끄고 내가 안 돌려놓고 그대로 놔뒀던가 봐. 뉴스 시간에 그렇게 한강 작가님이 상을 받았다고 그렇게 나와. 깜짝 놀랐지. 한강 작가님이 우리 집에 왔던 것이, 그 얼굴이 조금 생각이 나서 나 혼자 울었어. 우리는 알린다고 백번 천번 뛰어봐야 국내도 다 못 알렸잖아. 그런데 한강 작가님이 책 한 권으로 해서 이렇게 세계가 떠들썩하게 알려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그랑께 와서 취재하는 양반마다 물어보면 나는 한강 작가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그랬어.

Q. 책을 읽으며 한강 작가의 동호가 아닌, 김길자 님의 아들 재학은 어떤 분이셨을지 궁금했습니다. 문재학 열사는 생전 어떤 분이셨나요?

우리 재학이는 이제 고등학교 막 들어갔어. (소설 속 동호는 중학교 3학년이다.) 그랬는데도 너무나 아기가 속이 깊어. 우리가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이렇게 실패를 해갖고 테레비하고 전화통 한나 갖고 그렇게 너무 작은 방으로 이사를 해서 지 방이 없어. 그러면 이제 아버지하고 나하고 누워서 이제 잘라고 있으면 엄마 아버지 사이로 들어와서 자. 그래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그러고, 너무 착한 애기야.

제가 하는 말이 상고를 갈란다고, 그래서 왜 상고를 가야 누나는 인문계를 가는데 그랑께, 엄마, 아버지가 잃었던 돈, 상고를 가서 은행에 들어가 돈을 찾는다고. 그래서 엄마 조금만 고생하라고. 그것이 그렇게 생각이 나. 또 김치찌개를 그렇게 잘 먹었어. 재학이 생각이 나서 손주들 낳기 전에는 김치찌개를 안 해 먹었네.

그라게 44년을 보냈네. 경찰들한테 투쟁하면서 두들겨 맞고 그러고 다녀도 느그가 죽이든은 못하겄지 (생각했어). 한 놈 안 무서웠어.

문재학 열사의 생전 사진.

Q. 문재학 열사님을 찾으러 전남도청에 가셨던 그날 밤 이야기를 조금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는 내가 도청에 두 번이나 재학이를 찾으러 갔어. 두 번이나 찾으러 갔는데 안 온다고 그래서 (물어보니) 엄마, 초등학교 동창 창근이가 죽어서 들어왔다고, 창근이를 수습을 해놓고 집에 와도 온다고, 그래서 오늘은 못 간다고 그래. 생각해 봉께 친구는 죽었는디 내 자식만 살겠다고 데리고 와야?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아빠하고 둘이 집에 왔지.

그라고 5월 26일이 되니까 계엄군이 저녁에 들어온다고 그라데. 가서 데리고 오려고 갔는데 재학이가 안 온다 그래. 네가 여기서 뭐더려고 안 간다고 하냐, 집에 가자, 그라게, 여기서 선배님들 심부름도 해주다 7시에 있는 막차 타고 집에 간다고 그래. 그라고 혼자 기다리다가 또 전화가 와서 받응게 엄마, 차가 끊어져서 못 가겠네요, 그래. 그때는 무서워서 이제 나가도 못하고 들어도 못해. 재학이가 어린 학생들은 아마 손들고 나가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 나는 그 말만 듣고 또 그런다냐 하고 있었지. 그랬는디 세상에 27일 새벽이제, 2시 반 3시 그사이 됐는가, 도청에서 총소리가 났어.

이대선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이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김길자 님.

5월이면 5시면 날이 새. 그래서 5시가 넘어서 아빠하고 둘이 또 도청을 갔어. 언제 그렇게 학생들이 있었냐 싶게 아주 깨끗하게 물청소 다 해버리고 직원들도 고개 다 숙이고 이제 한 명 두 명 지나가고, 그냥 무서워서 말을 못 물어봐. 지금 같으면 무서울 것도 없는디,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냐고, 계엄군이 잡아갔냐고 물어봤을 텐디. 무서워서 못 물어보고 집으로 돌아왔어.

막막했지. 어디로 찾으러 가도 못하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랬는데 담임 선생님이 신문을 가져오셨어. 17세가량 고교생 상고머리 교련복 차림이라고, 재학이가 연고자가 안 나타나서 망월동에 가묘가 되어 있다고 그래. 묘를 파보면 틀림없이 재학일 것 같아 가서 팠지. 나는 그래도 어디가 살아 갖고 있겠지, 부패가 돼 갖고, 이렇게 생겨갖고 (재학이가) 아니기를 바랐지. 그런데 우리 친척들이나 선생님들이 보고 다 재학이라고 그랬어.

세상에 우리 재학이는 관도 없어서 두께가 이만하다 얇은 베니어 관짝에 담았어. 옷 한 벌도 못 입히고 광목으로 똘똘 말아갖고 그라고 묻어 넣었데. 묘 해놓고서는 장례식이라고 선생님들, 교장 선생님, 학생들 태운 스쿨버스가 한 대여섯 대가 와갖고 그렇게 묵념하고 갔어. 그것이 장례식이었어.

*콘텐츠 주의: 다음 이미지는 국가폭력과 희생자들의 시신 사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길자 님이 5.18 희생자들의 시신 중 문재학 열사를 가리키고 있다.

Q. 이후 오랜 기간 5.18을 알리는 운동에 투신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례를 치르고 와서 아무것도 안 먹고 물만 먹고 석 달을 집에가 누워 있었어. 그러다 내가 어떻게 정신이 좀 들었던지, 우리 재학이가 어떻게 죽었는데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디, 재학이가 못다 이룬 뜻을 어미라도 같이 싸우면서 이루어야지, 그라고 일어났지.

5.18 유족회가 결성됐어. 부모들만 있던 건 아니고 희생자의 2세들까지, 젊은이들까지 결성을 했어. 거기를 갈란디 (경찰이) 그것도 못 가게 해서 밑으로 끼어들고 들여다보고 무전기로 맞기도 하고 그랬지. 경찰서 문 앞에 가서 내 자식 살려내라, 그라고, 경찰서 앞에 앉아서 현수막도 달고, 그것이 날마다 반복이 됐지. 80년 후로, 그렇게 계속 활동했어.

유족회 여자들 다섯이서 빨간 매직으로 기저귀에다가 써갖고 몸에 칭칭 감고 서울에 간 적도 있어. 물론 이제 전두환이 물러가고 내 자식 내놓으라고 썼었지. 지금 생각하면 광화문 네거리인가 봐. 거기를 왕복으로 차가 오고 다녀도 여자들 다섯이 거기를 뛰어들었어. 한 5분이나 있응게 경찰차가 엥엥 하고 와서 종로 경찰서에 가고 그랬지. 그때가 85년도인가 86년도인가 그래. 그러다가 뭐시라고 완장을 찬 사람이 우리한테 진짜로 광주에서 사람을 그렇게 해서 죽였냐고, 6.25 때도 그렇게 잔인하게 안 죽였는데 그렇게 죽였냐고 묻데. 우리가 산증인이니께 마음대로 물어보시라고 그래갖고 저녁에 1시, 2시까지 이야기하고 그랬지.

경찰이 휘두른 무전기에 맞아 머리에 피가 흐르는 김길자 님의 사진.

Q. 5.18과 그 이후 이어져 온 투쟁의 결과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느끼시는지요?

세상이 변했다고 느끼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을 위해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싸운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이 듣기 싫은 말이더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돼야지 입을 딱 막아놓고 귀를 막아놓으면 쓰겄어. 안 되지, 우리도 국민잉게 할 말을 하고 살아야지.

Q. 한편, 오늘날 미얀마와 홍콩에서도 그때의 광주처럼 인권 탄압에 맞서 투쟁하는 이들이 있잖아요. 이들을 보면서는 어떤 감정이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그것도 우리 마음하고 똑같아. 내 가족 헛된 죽음을 안 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 아니여.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라고.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 어쩜 우리하고 이렇게 똑같냐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재학이가 아니었으면 이런 얘기도 모르고 살았을 것 아니여. 우리 재학이가 엄마를 어느 정도는 조금 깨우치고 간 것 같아.

2019년 6월 16일,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안을 반대하는 시위에 2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홍콩 시위 더 알아보기

Q. 마지막으로 앰네스티 지지자 분들께, 특히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독자분들께 전하시고픈 말씀이 있을까요?

국가폭력은 국민을 무시하는 거여. 하지만 국민도 다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입이 있는 것이라 자기들 마음대로 못 해. 우리 젊은 세대들이 같이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을 안 잊어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널리 널리 알렸으면 좋겠어.

김길자 님의 옷깃에 국제앰네스티 뱃지를 달고 있는 모습.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 작업을 하며 아래의 두 물음을 떠올리곤 했다고 말했다. (출처: 한강 작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의)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이미 우리가 손 쓸 수 없이 잔혹하게 스러져간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 비슷한 물음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과 기록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에 비해 너무 미약한 움직임이 아닌가? 우리가 이제와서 이런다고 그때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한강은 같은 강연에서 겸손하고 담담한 태도로, 질문을 다만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현재는 언제나 과거에 빚을 질 수밖에 없다. 남겨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일. 현재에도 계속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폭력과 왜곡에 단호히 맞서고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그렇게 스스로를, 미래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진행: 이대선(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이너)
정리: 백민하(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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